야구

당신이 몰랐던 최동원 3가지 이야기

역전의 명수 2023. 4. 25.

오늘은 프로야구 레전드 중의 레전드 최동원 선수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일화들이 많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3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롯데자이언츠-유니폼입고-웃고있는-최동원
최동원

여러분은 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의 캐치프래이즈를 알고 계십니까?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젊은이에게 낭만을, 국민들에게 여가 선용을”, 이것이 프로로 데뷔하는 한국야구의 포부였습니다. 그렇다면 꿈과 희망, 낭만에 가장 어울리는 야구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故 최동원 선수를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아, 또 84년 한국시리즈 얘기하려는구나', '아니면 85년 최동원과 선동열의 전설 매치 스토리?', '그것도 아니면 선수협 결성하다가 삼성으로 보복 트레이드된 이야기인가?'

 

모두 아닙니다.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 세 가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981년 코리안시리즈를 평정한 최동원?

1984년 코리안시리즈가 아니라 1981년 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실업야구에서도 1977년부터 1981년까지 포스트시즌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81년 실업리그 왕중왕을 가리는 코리안시리즈의 맞상대는 롯데자이언트와 육군 경리단이었죠.

 

실업야구팀 롯데의 명칭은 '자이언츠'가 아니라 '자이언트'였습니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실업 롯데에 입단한 최동원은 그해 팀이 소화한 36경기 324이닝 중에서 무려 206이닝을 혼자서 책임지며 17승 4패를 기록했습니다. 

 

코리안시리즈에서 경리단은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롯데보다 한 수 우위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경리단의 주요 맴버는 김시진, 권영호, 장효조 선수가 있었습니다. 뭔가 익숙한 이름들 아닌가요? 바로 3년 뒤 한국시리즈에서 만날 삼성라이온즈의 주축 선수들이죠. 그래서 81년 코리안시리즈는 상대팀만 달랐을 뿐이지 84년 한국시리즈의 프리퀄이라고 봐도 괜찮습니다.

 

시리즈의 흐름도 상당히 유사하게 전개되었죠. 벼랑 끝에 몰린 롯데를 구해낸 것도 최동원이었구요. 먼저 1차전, 2차전을 따낸 경리단이 쉽게 우승을 차지하는 듯했지만, 최동원의 불꽃같은 투혼으로 롯데는 기적의 역전 드라마를 쓰며 3승 1무 2패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코리안시리즈 6차전 동안 최동원은 선발, 불펜 가리지 않고 등판했고, 42와 3분의 1이닝을 던지며 2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이때 롯데 감독이 박영길이었는데, 그는 84년에 삼성라이온즈에 코치로 가게 됩니다. 

 

이미 전기리그를 우승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만날 상대를 고를 수 있는 입장에 있었죠. 순리대로라면 OB가 올라갔어야 하지만 삼성은 껄끄러운 OB 대신 롯데를 고르기 위해 져주기 시합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죠. 

 

그런데 당시 81년 최동원의 괴물 같은 활약을 생생히 기억했던 박영길은 롯데가 아닌 OB를 선택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해요. 롯데는 약체지만 최동원이 있기 때문에 만만하게 봐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요. 코치 박영길의 말은 묵살되었고 결국 삼성은 최동원의 롯데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내주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lIuCIe7JhA 

 

최동원은 왜 프로야구 원년부터 뛰지 않았을까?

혹시 이런 의문을 가져보신 적은 없습니까? 

이미 대학을 졸업했던 최동원은 왜 프로야구 원년부터 참가하지 않았을까?

 

그 해답은 바로 1982년에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국제대회였기 때문에 우승이 절실했죠.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된 겁니다.

 

프로선수들은 아마추어대회에는 출전할 수가 없으니 대표팀 구성이 난감해졌습니다. 결국 야구협회에서는 대표급 선수 중에서 노장들은 프로로 보내주고 젊은 핵심 선수들은 실업팀에 묶어 두는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선수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개인보다 집단을 중요시하는 시대 분위기상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최동원뿐만 아니라 김재박, 김시진, 장효조 같은 걸출한 스타들의 프로 데뷔가 82년이 아니라 83년이 되었답니다.

 

아, 그래서 82년 세계선구권대회는요? 네, 결승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대화가 역전 3점 홈런을 날리며 우승을 차지했죠.

 

NC 다이노스 창단의 주역이 최동원이라고?

초등학교 시절 야구만화를 보며 꿈을 키우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는 커브볼에 대한 책을 구해보며 담벼락에 공을 던졌습니다. 자신의 우상인 최동원처럼 멋진 변화구를 던지고 싶었던 거죠. 소년은 자신의 영웅과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상상을 합니다. 언젠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런 야구단을 만들겠다는 꿈도 가집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소년은 프로야구 아홉 번째 구단을 창단했습니다. NC 다이노스의 구단주 김택진의 이야기입니다. 어려서부터 야구광이던 김택진은 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야구단을 만들겠다는 꿈은 이뤄냈습니다.

 

마침내 NC가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바로 다음 날, 김택진은 최동원의 유골이 안치된 일산 청아공원 납골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린 영웅 앞에 우승 트로피를 바쳤습니다.

 


프로야구가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가 되는데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최동원 선수의 투혼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실망스러운 야구계 뉴스 속에서도 팬들이 변함없이 열성적인 성원을 보내주는 것도 초창기 선수들의 멋진 기억 때문일 겁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현재의 선수들이 선배 선수들의 투혼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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